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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코 서로를 정확히 알 수 없다.

프로스트가 말했다.


우리가 보는 타인은 사실 그 사람의 실체가 아닌 그 사람의 그림자를 보고 있는 것이라고...


그 말은 정말 옳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보는 타인은 그림자, 다른 매개에 의해 비춰지는 허상이다.

키가 160인 사람이 있다.

그의 키는 아침에도, 저녁에도 같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그림자는 아침, 저녁에는 길어져 거인이 되었다가, 한낮 정오에는 가뜩이나 작은 그의 키를 더 쪼그라뜨려 땅딸만하게 만든다. 그 사람의 그림자를 아침에 만난 사람은 말하겠지.


"그이는 참 키가 커"


정오에 그의 그림자를 만난 이는 또 이럴것이다.


"정말 키가 난장이지 뭐야"


기분이 좋았던 나를 만난 사람들은 나를 어쩌면 상냥한 여자로 기억할 지도 모른다.


지저분한 비가 잔뜩 내려 젖은 채 지하철 입구에서 나와 뛰고 있던 나와 마주쳤던 누군가는 그러겠지.


"정말 인상도 나쁘고 사납더라고"


나는 그다지 사나운 사람도 아니고 상냥한 쪽도 아닌데 그들은 그렇게 나를 언제 보았느냐에 따라 그리고 그때의 환경이 어땠는지에 따라 나를 정의한다.


그리고 나 또한 다른 이를 그렇게 쉽게 정의한다.


결국

우리는 서로의 허상을 기억하고 판단하고 또 재단할 뿐이다.


가장 끔찍한 것은 어쩌면

우리 스스로도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들여다 본 적 없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와 사랑이라는 감정을 공유했던 남자들은 어떨까

내가 더 좋아했던 고등학교때 짝사랑 대상 K는 나를 화도 내지 않고 항상 배려 깊고 보드라운 여자라고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겉멋이 잔뜩 들고, 화장을 또래보다 잘 해서 나를 잘 포장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던 대학교 2학년에 만났던 L은 나를 세상 도도하고 자신만만하고 종잡을 수 없는 여자였다고 생각했었다. 나를 만나는 것이 불안해서 괴롭다던 그는 결국 군대에 있으면서 바람을 피우는 그런 대단한 일을 해냈다. 브라보.


나이가 좀 들고 만났던 그 오빠는 또 어떨까

그 사람은 내가 엉뚱하고 재미있고 세련되었다고 생각했었다.

날 때부터 세련된 사람은 없다는 것쯤은 모두 알텐데 그런건 간과한다. 마치 그에게 나는 태어날 때 부터 꽤 세련된 경상도 여자였다.


프로스트의 이야기는 남편이 해 주었다.

그는 우울증을 앓고 난 후 부터 책을 많이 읽는다.

그리고 자신의 기억력을 믿지 못해 나를 하드 드라이브 삼아 꼭 공유하곤 한다.

그림자 이론은 꽤나 공감이 가고 또 흥미로왔다.


그렇게 한참을 프로스트 이야기로 열을 올리던 그의 마지막 말은 이랬다.


"난 꽤 당신과 오래 살고 있는데도 당신을 모르는 기분이야."


"맞아, 당신은 나를 몰라. 그리고 다 알 필요도 없어. 어차피 알려줘도 또 당신은 바로 앞의 내가 아닌 땅바닥에 드리워진 내 그림자를 보고 있을텐데 뭐."


그래도,

우리는 조금 희망적이다.

우리는 서로의 길고 기괴한 그림자, 짧고 뚱뚱한 그림자, 옆으로 누운 그림자, 똑바로 선 그림자... 서로의 그림자가 변한다는 것쯤은 알만큼의 세월을 같이 하고 있으니까.


적어도,

내가 정오에 만났던 남자나

석양이 질때쯤 만났던 남자들 보다 당신은 나의 실체에 많이 가까워 지고 있다고...

그렇게 말해주자 그는...

프로스트와 친구냐는 어이없는 소리로 이 심도깊은 대화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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