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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러브레터 (2)

꼭 이 나라라 그렇진 않겠지만 유독 많다. 모성애, 부성애 실종한 인간들이...

그들은 분명 그들이 원해서 되었을 부모라는 직무를 함부로 아무렇지 않게 유기한다.

사랑... 중요하겠지.

그래도 사랑보다 더 무거운 책임이라는 것이 생긴다면 어느 정도는 포기하고 살아야 하지 않나 라고 생각하는 나는 그들 말대로 너무도 보수적인 아시안인걸까


이 나라에서 애들 키우면서 각종 어지러운 관계들을 많이도 봤다.

매일 아침 각자의 아이를 데려다 주면서 안면을 트고 인사를 나누고 더 친해져서 볼뽀뽀를 하던 어떤 아저씨와 아줌마가 어느날 부터는 각자의 파트너를 정리하고 새로운 관계를 도모하는 것 쯤은 우습지.


이혼한 부모가 둘 다 새 사랑에 충실하고 싶다며 그들 사이에서 생겨났던 아이들을 미루다가 부모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도 고아원에 데려다 주는 것도 보았고, 언니의 남편과 재혼한 여자, 딸의 친구와 재혼한 남자... 한국의 김치싸대기 막장 드라마는 애교다.


한국 여자 중에서도 가까이 있던 이 중 한 명 보았다.

남편이 게으르고 한심하다고 내내 불평하다가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을 쿨하게 버리고 새 사랑을 찾아가던 어떤 여인.

나는 남의 사생활로 그 사람을 재단하면 안된다 생각하는 쪽이라 해도 그런 사람을 계속 친한 이로 두고 싶진 않았다.


나넷이 언젠가 저녁을 먹다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었다.


"우리 반에서 나랑 톰, 딱 두명이야."


"뭐가?"


"우리 둘 빼곤 다 엄마 아빠가 이혼했어."


그러자 오뎃이 맞장구를 쳤다.


"우리반에도 나랑 릴라 딱 둘"


그렇게 이혼이 흔한 나라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상처를 덜 받을까? 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누구나 그러는 편이니 어쩌면 자연스럽다고 받아들일까?


내 남편은 그런 이혼가정을 겪었던 사람이고, 아이들의 친구들 이야기를 전해들어본 바로 절대 그렇지 않다. 그런 부모가 흔할 뿐 그게 그들의 상처를 옅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남편은 나를 만나기 전 비혼주의자였다고 했었다.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는 절대 낳지 않는다고도 했었다.

나도 그런 편이었으니 그런 허세 가득한 결심 따위야 얼마든 바뀌는것 아닌가 라고 생각했었다.


올해 남편이 결국 우울증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고 있다.

그가 왜 만성 우울증이 생겼고 결국 심해지고 있었는지의 이야기는 자세히 한 적이 없다. 그 사람에게 그런 상처가 있었다는 것이 내게도 상처가 되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뭐랄까... 그리 가까이 있으면서 들여다 보지 않았다는 것이, 몰랐다는 것이 미안했고 그게 상처가 되었다.


남편 우울증의 원인이 바로 죽은 아버지였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두려워졌다 했다. 과연 내가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엉망인 아빠를 가진 내가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죽은 시아버지는 두고두고 잊을만 하면 저주를 퍼부을 일을 만든다.

그러다가 올해 초 날아온 시아버지로 인한 고소장은 이 남자를 폭발하게 만들었다. 의사는 기름이 마구 부어진 상태에서 작은 불씨 하나가 떨어진 것을 상상해 보라 했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잘 웃으면서 살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는 오랫동안 아버지라는 인간 때문에 많이도 고통받고 있었고 그것은 전혀 사그라지지 않고 있었다.


테오가 입을 닫게 된 것은 3년전이다.

전학교에서 부터 꽤 유명했던 이 소년은 어느날 갑자기 입을 닫고 어두워졌다고 그의 옛친구들이 전했다.

테오는 그의 가정을 매우 자랑스러워 하는 편이었다. 예쁘고 똑똑한 의사 엄마에 잘 나가는 사업가 아빠, 그리고 인형같은 여동생 이렇게 네식구가 소문나게 단란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사업가 아빠는 회사 광고 모델을 섭외해주는 에이전시 여사장과 바람이 났다. 그는 매우 당당하게 새로운 사랑이 생겼다며 이혼을 요구했다. 테오의 엄마가 어느밤 그의 방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와 이렇게 말했다.


"정말 미안하지만 엄마와 아빠는 더 이상 같이 살지 못할 것 같아. 우리는 더 이상 서로를 사랑하지 않아."


이후 테오와 여동생은 일주일씩 번갈아가며 엄마집, 아빠집을 오가는 생활을 한다.

그들은 빨리도 각자 재혼을 했다.


그리고 그 재혼 새활이 일년 조금 넘었을때 또 각자 함께 다시 이혼을 한단다.

그의 엄마는 어느새 새새 아빠가 될 남자를 이미 이번 방학에 데리고 와 인사를 하게 했다.


"나넷,

나는 너를 정말 사랑하지만 이게 사랑일까. 내가 과연 사랑은 할 수 있는 인간일까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어. 내 부모란 인간들은 사랑이라는 것을 자주도 하고 자주도 끝내는데 내가 생각할때 그렇게 가벼운 감정은 사랑이 아니야. 하지만 그들이 낳은 나도 결국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잠 들지 못한지 며칠째야. 그러다가 너에게 그런 문자를 보낸거야. 이건 너와는 아무 상관없는 문제야. 난 나 때문에 혹시나 누구라도... 그게 만약 너라면 더욱... 상처 받게 된다면 정말 나 자신을 너무 혐오하게 될 거야.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나는 멈추려고 해.

난 그런 인간들 사이에서 태어난 버려진 아이니까.

제대로 사랑할 수 있을리 없어.

내가 망가지기전 정말 사랑이라 믿는 감정을 오롯히 쏟은 건 너라는 것만 기억할게.

너도 그렇게 기억해줘.

난 누군가를 상처입히기 전에 스스로 차단되어야 하는 위험한 짐승이야.

넌 아마 나를 비겁하다고 할 수도 있겠고 시시하기 짝이 없는 놈이라고 겁쟁이라고 기억할지도 모르지만

난 태어나 가장 큰 용기를 내어 너를 향한 마지막 사랑으로 너를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줘."


나넷은 그가 보내온 문자를 답지 않은 심각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보고 또 보고 있었다.

하도 심각해서 누가 보낸 문자인지도 모른채 우리는 혹시 아이가 누군가와 싸우는건가 걱정을 했다.

부모가 하도 걱정을 하고 호들갑을 떠니 결국 그녀는 한숨을 쉬더니 우리에게 문자를 보여준다.

어른인데... 읽고 나서도 뭐라 해야할지를 모르겠다.

한참을 생각하던 남편이 결국 입을 열었다.


"제기랄... 난 이 아이가 가여워죽겠군.

그리고 정말 너무도 이해가 가... 얘는 지금 끔찍한걸 겪고 있단 말이야.

그렇게 새로운 인간을 만난 부모들은 아이의 감정따위 상관없이 지극히 이기적으로 행복해 죽지.

아이들 앞에서도 새 사랑과 스킨쉽도 스스럼 없이 해대. 그게 얼마나 아이 입장에서 역겹고 힘든 고통인지는 상상도 못할테지.

그냥 이 아이를 좀 내버려둘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어차피 어떤 말도 그다지 위로가 되지 않을텐데... 그리고 또 너도 뭐라 해야 할지 모를테고..."


아무 말 없이 다시 읽었던 그의 문자를 다시 곱씹고 앉은 아이를 두고 저녁 준비를 하러 부엌으로 내려왔다.


"역시... 저런 상황이면 비슷한 상황의 아이와 얘기를 하는게 더 도움이 되겠지?

나넷은 뭐라 해줘야 할지도 모를테고..."


남편은 문자를 본 내내 화가 나 있었다. 그 대상이야 뻔했다. 유독 사이도 좋고 예뻐했던 아이니 그의 정신 나간 부모가 얼마나 혐오스러울까. 나 또한 그러니...


"그건 아니지.

어차피 비슷한 애들끼리 얘기해봤자 하나 도움 안돼. 각자 본인 늪이 더 깊다는 소리만 하다가 끝나거든.

하나 마음 풀리지 않고 얘기하고 나면 더 껌껌해지곤 해..."


좀 더 살았으니 이럴 땐 이렇게 얘기하면서 위로해 주는 건 어때? 하는 혜안이 있으면 좋겠지만...

나도 이런 쪽은 꽝이다.

한참 생각했는데 입맛만 없고 아무 뾰족한 수도 떠오르지 않아 비겁하지만 나는 포기하기로 했다.


저녁을 먹고 남편과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잊었다. 테오.

미안하지만... 내 아들은 아니니까...


나넷은 거실 한편 소파에 앉아 음악을 들으면서 그림에 집중해 있었다.


이층에 올라가 아이의 방을 무심코 들여다보는데 그녀의 맥북이 열려 있고 다 써 놓고 전송 버튼은 누르지 않은 답문자가 열려 있다. 처음엔 곁눈질로 보다가 결국 의자에 자리하고 진지하게 읽게 된다.


"테오.

잘 들어.

난 너에게 상처받지 않아.

난 너에게서 이성으로의 사랑을 구한 적도 없고 받지도 않으니까 말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면 그래도 돼.

그런데 알아둬.

난 너를 계속 사랑해.

처음부터 나는 진짜 멋진 인간인 너를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앞으로도 그럴거야.

세상에 변하지 않는 사랑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도 보여줄거야.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 상처받지 않아.

난 너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해. 그것도 너의 잘못이 아닌 걸로는 더욱.

너는 크고 있고 강해지고 있어.

잘 생각해봐.

어차피 조금만 더 크면 넌 멋진 어른이 돼.

보기 싫은 건 보지 않을 자유도 갖게 돼.

더 이상 마음에 들지 않지만 부모라는 이유로 기대야 하는 것도 그만할 수 있어.

그러기 위해서 넌 너에게 집중해야해. 넌 너무 그들에게 집중하고 있고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방지하고 있고 너와 그들이 같다는 이상한 동기화를 하고 미리 상처받고 있어.

우리 아빠는 너희 아빠보다 더 심한 아빠를 갖고 있었지만 그의 아빠처럼 살지 않아.

흔들리지 않는 사랑을 하는 사람도 세상엔 많이 있어.

그리고 내가 아는 너는 그런 사람이야.

어딘가 감정을 토해야 할때가 온다면 나한테 해.

기꺼이 받아줄게.

어차피 속상한 일은 네 능력밖이면 해결되지 않아.

너에게 집중하고 다른 재밌는 것들로 채우자.

나랑 게임해.

나랑 만화봐.

너네 집이 싫으면 우리집에 내내 와 있어.

내가 놀아줄게.

너희 부모님이 너에게 신경쓰지 않는다고 섭섭해 하지마.

우리 부모님은 너에게도 나눠 줄 신경이 남아 도는 오지라퍼들이야. 알지?

우리 개도 널 좋아해.

학교 여학생들 다 너만 바라봐.

세상에 인간이 너희 부모 둘만 있는게 아니란 걸 기억해.

그리고 무엇보다

넌 내가 있잖아.

나는 누구에게도 이렇게 긴 답장을 써 본 적이 없어. 알지?

속상한걸 잊으라 노력하라는게 아니야. 그 노력 자체가 더 생각나게 할테니까.

다른 걸 하자. 혼자 하는 건 힘들어. 나랑 해... 알았지?"


다 읽었는데...

왜 내가 울고 있지?


결국 오지라퍼인 내가 아랫층에 있는 딸에게 갔다.


"왜 전송 버튼 안 눌렀어?"


"... 내가 더 속 뒤집는건 아닐까 고민 되어서... 그렇지만 내 솔직한 마음이거든. 보낼까?"


"보내. 아무 말도 없는게 더 서러울지도 몰라...너에게 잡아달라고 나 좀 서게 해달라고 하는 메세지일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나넷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뛰어 올라가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오늘

테오가 우리집에 다시 놀러왔다.

우리는 더 열성 방청객이 되어 주었다.

아이는 한참 놀고 떠날때쯤 너무 웃어서 얼굴에 열이 난다고 했다.


그래,

바로 이게 내가 내 딸을 존경하고 자랑스러워 하는 진짜 이유다.

그녀는... 사람의 마음을 고칠 줄 알기 때문이다.



댓글 1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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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komentarzy


유니
11 wrz

눈물나네요.. 나넷의 답장에 저도 위로를 받네요.

Polub
Odpowiada osobie:

저도 이 답장을 여러번 읽었어요... 그냥 위로가 되더라고요.

Polub

goi211
30 sie

글을 읽으면서 어른이 저도 테오한테 무슨 위로를 해야할 지 감도 못잡았는데... 나넷 답장 정말 감동적이네요. 수학만 잘하는 게 아니라 공감 능력도 높고 진심을 제대로 전달할 줄 아는 소녀 ㅠㅠ 감정적인 지지와 대처방법까지 없는게 없는 조언이에요. 어떻게 저렇게 현명할까요? 테오가 바라는 관계가 아니여도 둘의 아름다운 인연이 앞으로도 쭉 계속되었으면 좋겠네요. 고서방님 우울증 있으시대서 정말 의외라고 생각했는데 시아버지 ... 하 진짜 가지가지 하는 양반이시네요. 부관참시를 할수도 없고 ㅡㅡ ... 아이들의 엄마인 아젤님이 최고의 아빠라고, 나도 이런 아빠가 있었으면 한다고 하셨잖아요. 아내의 인정보다 더 명확한 게 있을까요? 고서방님이 그 부분만은 걱정 안하시고 치료에 차도가 있으시길 바랄게요. 지구 반대편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고 갑니다... 이모 잘 울지? ㅋㅋㅋ 항상 웃기고 울리는 글 써주셔서 감사해요.

Polub

myth4eb
26 sie

세상에...팟캐로 들었을 때도 찡했지만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으며 읽으니 더 울컥하네요. 아이가 너무 안쓰러운데 그래도 곁에 좋은 친구와 오지라퍼(?) 가족들이 있어 다행입니다.

Polub
Odpowiada osobie:

자꾸만 신경이 쓰여요. 친엄마가 더 신경쓰여 해야할텐데... ㅜ.ㅜ

Polub

copy2580
25 sie

짝사랑으로 애태우는 모습이 안타까웠는데 사랑은 아직 진행형인지는 모르지만 그것보다 더 값진 찐우정으로 마음의 상처가 조금이라도 아물었으면 좋겠어요

아직 부모의 보호가 절실히 필요한 애기들인데 사랑은 잠시 접어두고 나넷가족에게 치유라는 좋은선물을 받았으면 해요

나넷은 진심 속깊은 좋은 친구네요

이런 친구 만난것도 행운입니다 ^^

Polub
Odpowiada osobie:

맞아요. 저도 딸에게 그 말을 해주었어요. 그래도 그 아이는 네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Polub

sjy
24 sie

나넷 정말 속이 깊네요.. 편지가 마음을 울려요. 분명 큰 위로가 됐을 거예요ㅠㅠ 테오가 더 이상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Polub
Odpowiada osobie:

감사합니다^^ 요즘은 나넷이 테오를 귀찮게 하고 있어요. 귀찮아야 딴 생각이 안 든다고... 그마저도 저는 감동이었습니다 ㅜ.ㅜ

Po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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