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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의 소변검사

돌아보니까… 나는 내 시험날에도 속 편했던 사람이었네. 학고 보는 날도 처음 보는 낯선 아이가 긴장에 어쩔줄 몰라하면서 손에 자꾸 땀이 채인다고 말했을때도 ‘희한하네.. 어떻게 신체 한 부위에서만 땀이 날수가 있지?’라고 혼자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세월을 돌아서 이제야 그 의미를 알겠고 실제로 손에서 땀이 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이의 소변 검사날이 그렇다. 이제는 수치가 무조건 내려가기만 하지는 않는다는걸 충분히 알아서다. 이 얄궂은 병은 낫는듯 하다가 약 복용량이 조금 내려가면 미친듯 날뛰고, 그러다가 다시 수그러들고 그러다가 다시 좀 기어오르고… 불치병은 아니지만 예후가 너무 다양해 까다로운 병이라고 주치의가 이미 말했었다.


약이 좀 줄고 수치가 좀 내려가면서 아이는 아주 가끔의 간식을 허락 받았지만 인간의 습관과 정신의 굴레는 어찌나 무서운지 허락이 된 자그마한 사탕 앞에서도 아이는 심호흡을 하고 몇 번이나 불안한듯 우리에게 ‘진짜지? 먹어도 되는거지?’ 라고 확인을 하는데 아무렇지 않다가도 그냥 그 모습에 속이 뒤집힐 때가 있다. 수십 번 반복하고 있는 그 질문이 또 떠오르니까. 대체 우리가 뭘 잘못해서 이런 병을 겪고 있는거지?


내가 가장 존경하던 인간은 이순신이다. 한 사람의 힘이 엄청날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거의 유일무이한 예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포기하지 않는 자의 초능력… 이라고 유치하게 이름 붙여 본다.


이제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간은 내 막내 발렌티나가 되었다.

기적을 이루어야만, 업적을 세워야만 존경을 얻을 수 있는게 아니란 것을 갑자기 알았달까…


아프게 된 후 아이가 변했다.

물론 코르티잔의 후유증으로 감정이 격할때도 많지만 그 와중에 놀라운 것은 본인이 정상이 아니란 것을 항상 자각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아이는 갑자기 폭발을 하다가도 금세 책상에 우두커니 앉아 있거나 구석에 무릎을 모으고 쪼그리고 있을 때가 있다. 왜 그러냐고 물으면…


“내 안의 나쁜 발렌티나가 잠들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야”


코르티잔은 처음에 60미리그람에서 50으로… 그리고 40으로… 그러다가 이제는 격일제로 40을 복용해야 하는데 의사가 헷갈리지 않게 달력에 미리 다 표를 해두는 것이 좋다고 했었고 당연히 그리 하고 있지만 사실 소용없다. 이미 환자인 꼬마가 철저하게 알고 있다. 이 주에 한 번 하는 소변 테스트 날도 말할 필요 없이 금요일 아침이면 아이가 미리 소변을 통에 받아서 가져가면 되도록 스스로 준비를 해 놓고 있다. 당연하다고? 나는 여덟 살에 저러지 못했다.


아침에 소변통을 가져가면 통상 오후 네 시전에 검사 결과가 나오는데 어제는 그렇지 않았다. 다섯시가 훌쩍 넘어도 검사결과가 이메일로 오지 않아 결국은 연구실에 전화를 하고… 내부 문제가 있어 검사 결과가 조금 늦어지고 있으나 곧 통보될거라고 한다. 목소리가 익숙한 연구실 마담은 내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고 걱정마라고 다정하게 말하는데 아이 때문에 속이 타는 걸 알아주는 그녀가 또 고마워 울컥한다.


계속 핸드폰 새로고침을 하다가 마음을 가라앉히려 피아노를 해도 엉망, 책을 봐도 같은 자리.. 그러다가 드디어 검사결과가 날아왔다.


20 이하가 정상치인데 4주전 20,4를 보아 환호했었지만 또 2주전엔 62로 올라 좌절했었다. 이번에는…


드디어 16,2!


일희일비하면 안 되겠지만 방정맞은 엄마는 또 소리를 지르고… 같이 기뻐했던 꼬마가 갑자기 그랬다.


“우리 2주간만 기뻐하기로 해. 아직은 모르는거니까. 그래도 우리는 기쁘고 싶으니까. 기쁨의 유효기간을 두면 되잖아. 그래서 다음에 또 결과가 좋으면 다시 2주간 더 행복한걸로… 어차피 인생은 그정도씩만 행복해도 진짜 행복한거니까.”


알쏭달쏭한 그녀의 말을 자꾸만 곱씹어보게 된다. 어떻게… 너는… 벌써 영원한 행복은 없다는 것을 알아버린거니….




댓글 2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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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Comments


eoeo8o
Nov 20, 2023

발렌티나! 하루 빨리 완쾌되길 바랍니다.

아픈만큼 성숙해진다더니.. 막내가 커버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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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3951
Nov 10, 2023

수치가 좋아져서 넘 다행이예요~ 발렌티나의 말이 저에게도 참 와닿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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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y2580
Nov 10, 2023

이제 2주의 행복이 아니고 고생 끝이 다가온것 같아요

아직은 여전히 불안함으로 지내시겠지만 괜찮을거여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가족들 모두 행복하세요~

댓글을 앞에도 적었는데 어디로 가버렸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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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bee
Dabee
Nov 08, 2023

8살 아이에게 이토록 감동을 받을 수 있다뇨.... 맞아요 그 정도씩만 행복해도 행복한 거니까요. 발렌티나 덕에 또 상기하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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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sbsyh0222
Nov 07, 2023

2주 행복하고 2주 두 더더 행복하고 계속 더더더~~행복하실거에요 발렌티나 한마디한마디가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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