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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몇 시간 동안 책을 읽었다.

사실 별 것 아닌데.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인데.

몇 년간 해보지 못한 것. 몇 시간을 내리 아무 생각 없이 책을 읽는 것.


나는 어렸을 때 세상에 알려진 고전의 대부분을 다 읽었었다.

과연 내가 그 어려운 책들을 다 이해했는지... 혹은 한권 한권 정말 재미가 있었는지 까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까마득히 어린 시절에...

하루에 몇 권을 미친듯 읽던 시절도 있었다.

찬찬히 돌아보니... 춘희를 읽고 나서는 톨스토이가 재미가 없어졌고 루팡을 읽고 나니 헤밍웨이가 재미 없었다. 대학 졸업하고 IMF 들이닥쳐 직장 못 구해 과외로 연명할 때 그 불안한 시절은 만화방에서 보냈다. 만화를 섭렵하고 나서 고전을 들여다 보지 못했다. 오만하게 생각했다. 뭐 어차피 대부분 다 읽은 책이니까.

책은 읽고 또 읽어야 비로소 그나마 이해하게 된다는 것을 건방지게 간과했다.


몇 년이 지나 만화로 길들여진 싸구려 취향을 디톡스 하고 나서야 다시 제대로 된 책을 읽었다.

그러다가 책을 쓰게 되었다.

이후로 남의 책을 읽지 않았다. 혹시라도 쓸데 없이 좋은 기억력에 남의 구절이나 아이디어가 남아 나도 모르게 베낄까봐.


나와 아예 분야가 다른 책이 아니면 이후로도 읽지 않는다.


오늘 나는 책을 읽었다.

요즘 나는 디톡스를 하는데 치중하고 있다.

더 채우려 하지 않고 가진 것 중 쓸모 없고 해가 되는 것을 비워내는 디톡스다.


오늘 나는 남편을 디톡스 했다.

이 인간은 며칠째 나를 매우 짜증나게 하고 있으므로 싸워 나쁜 것을 더 채우는 것 보다 그를 하루 정도 내 주변에서 걷어냈다. 그리고 온전히 혼자 방에 앉아 책을 읽었다.

내 책을...

내가 오늘 읽은 내 책은 '당신은 이별이 두려워 미리 이별한 적 있나요'였다.

이 책은 두껍다.

다 읽어내는데 한 다섯 시간이 걸린 듯 하다.

이 작가는 참 글을 잘 쓴다.

이렇게 재미있을 수 없다.

잘 쓴다고 칭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내가 썼는데도 미친 듯 웃고 있다.

그 시절의 겨울이 떠오르더니 결국 다 알고 있는 결말인데도 나는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울었다.

그때 그 겨울처럼 절절하고 아프게 울지는 않았지만 아직도 눈물이 난다.

그리고 내가 쓴 결론처럼...

정말 다행이다.

그사람과 딱 그때 헤어져서.

내 피부가 탱탱할때, 내가 봐줄만 할때, 내가 온전히 내 인생으로만 충분히 고민하고 아플 수 있을때, 그리고 그도 멋진 청춘일때...

그래서 이렇게 나이 들어도 눈 밑에 주름이 잡히는게 당연한 시절이 되어서도 언제고 책장만 열면 우리는 그 겨울 찬란했던 청춘으로 남아 있으니까.


청춘이 그토록 반짝이고 아름다운지 그 중간에 서 있을땐 몰랐다.

내내 나 보다 더 간수해야 하고 걱정해야 하는 새끼가 없다는 것이 그토록 자유로운지도 몰랐다.


습관과 생활이 되어 버린 사랑했던 이는 이토록 한번씩은 며칠정도 안 보는게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독성이 있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것도 몰랐다.


제기랄...

감상적인 글로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방금 남편이 또 이상한 콧수염 꼬라지를 하고 티셔츠를 갈아입는다는 핑계로 방에 들어온 꼴을 봤는데 흠칫 아직도 저 인간의 꼴을 보고 싶지 않은걸 보아 나의 디톡스는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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