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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를 다시 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가 친구정도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도 나와 같은 마음으로 시작했었다면 우리는 몇 번 연락 하지 않아 듬성듬성 그렇게 꺼져가는 사이가 되었을 테지만 그는 다른 마음을 심었던듯 하고 일방적인 사이로 한동안 지냈다. 연락을 하는 것은 그였고 나는 딱히 피할 마음까진 없지만 그렇다고 같이 태워보고자 하는 열정도 없는 그런 사이말이다.


이틀 전 연락을 하고도 항상 그의 전화 첫 인사는 같았다.


"잘 지냈어? 내가 전화 안 한 이틀간 별일은 없었고? 남자친구도 아직 안 생겼고?"


그 시시한 물음이 사실은 진심이었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보니 알겠다. 초조한 마음을 숨기면서 호탕한척 하는 그 한결같은 안부인사에 나는 선인장처럼 까칠하기만 했었다.


"고작 이틀 지났는데 뭐가 그렇게 달라졌겠어."


'잘 지냈어?' 하는 물음에는 '응, 잘 지냈어. 고마워. 너는?' 이라고 묻는 기본 예의도 없는 건방진 20대 초반의 여자애. 그게 나였다.


그러다가 우리는 얼떨결에 연인이 되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그것은 또한 그의 노력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한쪽만 끓던 사이로 한참을 지내던 우리는 그 크리스마스 이브에 연인이 된다. 그것은 크리스마스가 갖는 요상한 기운일수도 있겠고 운명일수도 있겠고 나의 흔했던 변덕일수도 있겠다.


사람들이 절대 외롭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알고보면 세상 외로운 인간, 그게 나였다. 데이트를 밥 먹듯 하고, 이리저리 많이 소개도 받고 만나고 다녔지만 정작 무슨 날이면 혼자 있었던 인간. 딱히 운명을 믿지도, 사랑에 쉽게 빠지지도 못하는 주제에 의미없는 만남만 하고 다니니 연인이어야 빛나는 날은 혼자일 수 밖에 없다. 그 크리스마스 이브에 나는 미리 약속하지 않아도 만날 수 밖에 없던 고등학교 동창들과 매년 자정까지 부어라 마셔야 했던 소주 파티에도 나가지 않았다. 신촌 한복판, 커플들이 미친듯 몰려다니는 그 쓰나미 한 가운데 살면서 방구석에서 수도쿠를 하고 있었다. 냉장고가 채워져 있고, 라면도 있고 뭐든 해먹으려면 얼마든지 입에 넣을 수 있지만 그마저도 귀찮은 우울하고 게으른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아침, 점심을 건너고 게임을 하다가 수도쿠를 하다가 재미도 없는 텔레비전을 일초에 한번씩 채널을 돌려가며 뻉뻉이를 시키고 있는데 왔다. 전화가... 그로부터...


"안 나가고 있었네? 하루종일 그냥 집에 있는건가?"


"그렇다. 오바. 그러는 너도 뭐 별 볼일 없어보이는구만."


"운명이네? 우리는?"


"뭔 운명? 둘다 드럽게 외로운 운명?"


"점심은 먹었어?"


"아니... 만사 구찮고... 나가서 사오자니 꼴보기 싫은 커플들이 너무 많아."


"뭐가 먹고 싶은데?"


"햄버거."


"알았어."


전화를 하면 재미도 없는 이야기를 자꾸만 이어가면서 끊으려 하지 않던 인간이 그날은 짧게 알겠다고 한 후 끊어버린다. 가뜩이나 심심해서 전화통이라도 붙잡고 있으려 했건만... 이 인간은 이래저래 눈치 없다고 혼자 중얼거리다 잠시 숨돌리고 있는 텔레비전을 또 볶아댔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누군가 초인종을 누른다. 나는 한참 유행하던 데낄라 바 2층과 3층을 빌려 살고 있었다. 이미 초저녁에 맛이 간 어떤 인간이 또 벨을 누르는거겠지. 움직이기도 싫어서 꼼짝하지 않고 있었더니 이내 전화가 온다.


"그새 나간건가? 왜 문을 안 열지?"


"너야? 야! 올거면 미리 말을 했어야지. 지금 완전 거지꼴이구만."


"아... 그렇지 참... 괜찮아 기다릴게. 천천히 준비하고 문 열어줘."


그냥 가라고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십 분.... 느릿느릿 옷 갈아 입는데 십 분... 대충 점 가리느라 밑화장만 하는데 십 분... 문을 여니까 포장종이가방을 주렁주렁 든 그가 나를 보더니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종이가방들과 함께 그는 내 원룸으로 들어섰다.

종이가방들은 죄다 패스트푸드 마크가 현란하게 찍혀있는 것들이다. 파파이스, 케이에프씨, 맥도날드, 버거킹, 롯데리아...


"뭐야 이게 다..."


"햄버거 먹고 싶다며. 어떤 걸 좋아하는지 몰라서 정성을 좀 부렸지. 다 안 먹어도 돼. 먹고 싶은 것만 꺼내 먹어."


추웠는지 코끝이 빨개진 그를 쳐다보다가 갑자기 없던 사랑이 피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날부터 연인이 되었다. 그는 곧 세상 제일 바쁜 종합병원 인턴이 되었다. 나는 다시 남자친구가 있지만 없는 듯 살게 된다. 그렇다고 내가 절이나 군대에 들어 앉은 것이 아니니 여전히 주위에 파리, 나방은 꼬였다. 지조라곤 없고 사랑이 깊어야 한다는 것도 잊은 나는 슬슬 그와의 관계가 심심했다.


물이 식은 것 보다 더 알아차리기 쉬운 것은 사람의 마음이 식은 것이다.


그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가 식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참 프로젝트를 하느라 정신이 나가 있는데 유독 전화를 자주도 걸어온다. 세상에서 제일 바쁜 인턴이 그렇게 자주 전화를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너무 바빠 연락 못한다는 남자들의 말이 개뻥이라는 것을...

같이 프로젝트를 하는 사람들이 '또 남자친구야?'라고 할 정도로 자주 전화를 걸어오던 그는 어느날은 욕먹을 각오를 하고 병원을 탈출해 여의도 증권가에 나타나 점심을 굳이 같이 먹고 돌아가곤 했다. 프로젝트가 거의 마무리 되고 시스템 점검을 지겹게 하고 있던 어느저녁, 야근을 하다가 오랜만에 채팅창에 들어갔다. 처음 보는 아이디의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이상하게 죽이 잘 맞는다. 그가 제안한다. 내일 신촌에서 밥이나 같이 먹을까? 남자친구가 있지만 밥 정도 먹는게 뭐 대순가 싶다. 그렇게 나는 나에게 관대한 나쁜 년이었다. 흔쾌히 그러기로 했다. 사실 그 새 남자가 궁금하기도 했고 대화가 즐겁기도 했다. 남자는 이상하게 나와 잘 통하는 느낌이었다.


그날 밤, 세상 바쁜 인턴이 응급실을 돌다가 짬을 내 전화를 걸어왔다.


"생각해봤는데 말야. 인턴이 끝나도 레지를 하게 될거고 조금 나아진다 해도 나는 여전히 노예처럼 바쁠거거든. 그래서 말인데 그냥 우리 지금 결혼하는거 어때?"


뭐??

그가 했던 말 중 가장 충격적인 말이었다. 갑자기? 난 아직 어린데? 너도 어린데? 그리고 넌 계속 바쁘고 난 너한테 미리 묶이는거네?


"생각도 안 해 본 일이야. 너 잠을 너무 못 자서 어찌된거 아냐?"


"그게 그렇게 놀랠 일인가? 나는 해도 좋을 것 같은데. 그럼 내가 불안하지 않아도 되고..."


나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매몰차게 거절했다.


다음날, 미리 약속했던 그 채팅창의 남자를 만나러 레스토랑으로 들어섰을때... 눈 앞이 하얘진다.

그 새 남자는... 어제밤에 내게 청혼을 했던 그 남자였으니까... 그는 그렇게 나를 떠봤던 것이었고 나는 아주 깔끔하게 걸려들었고... 우리는 그날 싸우고 나쁘게 헤어졌다.


몇 달 후,

낮부터 술에 취한 그가 전화를 걸어왔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만나. 너 때문에 너무 힘들어...."


자주 가던 신촌의 까페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얼굴이 많이 여위어 있었고 나는 죄책감에 마음이 저렸다.


".... 마지막 부탁이 있어. 네가 나를 많이 힘들고 아프게 했으니까...."


"말해. 내가 잘못한거 맞으니까."


"네가 나 아프게 했으니까 나도 너 한번만 물자."


뭐??

물자고??? 내가 제대로 들은건가? 그러나 그는 진지했다. 이게 뭔 짓인가 싶으면서도 하는 수 없이 팔을 내밀었는데... 그가 진짜 물었다. 아프게...


미친 놈이라고 욕했었지만...

평생 잊혀지지 않는 그 이별.

아마 그는... 잊혀지기 싫어 내게 그랬었다는 것을 알것도 같다.


이후에 다른 남자와 그 까페를 들렀을때 여전히 그곳에서 일하고 있던 그날의 목격자 알바생이 다가와 속삭였다.


"웬만하면 긴 팔 입고 남자 만나세요 이제..."


--------


어제 중학생을 데리러 가면서 박진영의 노래를 들었다.

추억의 노래는 나를 추억의 장소로 데려다 놓는다. 나는 프랑스 시골길을 달리고 있는데 어느새 눈 내리고 춥던 신촌바닥이다. 그리고 그 남자가 또렷이 떠오른다. 주차를 하고 아이를 기다리다가 그냥 그의 이름을 검색해본다. 이름이 특이하다는 것은 뭐랄까... 비밀스럽기 힘든 법이다. 그가 하고 있는 의학 채널이 떴다. 얼굴은 그대로였고 돈과 명성을 입고 세련되어져 있었고 운동을 열심히 하는 모양 샤프같이 말랐던 몸은 근육질이다.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잘 지내주어 고맙다고 절대 쓰지 않을 댓글을 혼자 마음속으로 달아본다.


그리고...

미안해. 너의 진심을 그렇게 구겨버려서...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날 일은 없을 우리지만... 멀리서 혼자 잘 지내는걸 볼 수 있어 좋은 세상에 살고 있다고나 해야할까...


차에 탄 중학생을 붙들고 내 유치하고 나빴던 연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햄버거 바리바리 싸온거 너무 멋져! 엄마! 또 다른 사람 이야기 해줘!!!"


그래... 또 떠오르겠지. 내 기억의 단편들이... 이제 나는 새로운 기억이 생기기보다 만들어둔 그 많은 기억을 하나씩 꺼내면서 웃는 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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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Comments


Dabee
Dabee
Oct 11, 2023

햄버거.. 뭐든 메뉴만 말하면 무슨 브랜드의 어떤 메뉴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사다주던 남자랑 얼마 전에 헤어졌는데... 저도 나중에 이렇게 추억할 날이 오겠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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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 얼마전 이별하셨군요. 괜찮아요. 예쁜 추억으로 다시 돌아볼 날이 꼭 옵니다. 그리고 더 인연인 사람과 함께 하게 될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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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8016
Jun 08, 2022

아젤~ ㅋㅋㅋ 빨리빨리 나도 빨리 또 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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