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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방 스토리 - 그 아줌마랑 친구 하세요....

우리 동네 대형 마켓 안에는 따로 수산물 코너가 있는데 마트 직영이 아니라 개인업자에게 임대를 주는 형식으로 얼마 전에 주인이 바뀌었다. 어쨌건 나는 주인이 바뀌어서 좋았다. 왜냐면 새로 온 주인아저씨는 안이하게 팔던 생선만 내내 파는 것이 아니고 매주 새로운 생선들을 셀렉션 하여 다양한 선택의 폭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외국 생활 중에 처음으로 만나는 아귀를 보고 하도 반가워서 말을 걸 뻔...


아니, 사실 나는 그를 처음 만난 날부터 크나큰 호감을 가지게 되었었다.


그날, 오랜만에 파리를 다녀오던 길 마트에 들렀다. 꼭 시골 사람이 청담동 갈 때 온갖 멋을 다 부리듯 나 역시 매번 파리를 갈 때면 세련된 파리지엔들 사이에서 보통은 되어 보려고 용을 쓰는 편인데 꽤나 화장과 머리, 패션이 모두 마음에 들게 잘 되었었다.


사람이 자신감이 살면 사교적이 되기도 하는데 내가 그렇다. 스타일링에 자신이 있으면 살짝 말이 많아진다. 대부분 마트 수산물 코너에서 그다지 말을 많이 할 필요는 없었다. 원하는 생선의 이름을 부르고 원하는 양을 말하면 그만큼의 생선은 내게 와 맛있는 꽃이 된다...


그날은 사실 구매에 별 상관없는 이야기를 조금 했다. 말했듯이 스타일링이 잘 된 관계로... 반가운 아귀 이야기를 했고 내 나라에서는 이 생선을 어찌 참 맛있게 먹는지 얘기했고 옆에 다소곳이 놓인 골뱅이 무침은 또 얼마나 맛있는지를 아저씨를 붙잡고 떠들었다. 젊었을 때는 정말 어부였다는 그을린 피부의 아저씨는 사람 좋은 웃음을 띤 채 주문한 골뱅이를 저울에 올리며 말했다.


“그나저나 마담은 정말 예쁘군요. 살면서 본 아시아 여인중 가장 예뻐요. (살면서 아시아 여자 한 세 명 본 걸로 추정) 대체 나이가 몇이오? 너무 어려 보여 가늠할 수가 없구랴. 무슈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요?”


육지동물 마니아인 한 남자는 마누라가 생선가게에 진을 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아까부터 흡사 복어 같은 볼따구니를 하고 잔뜩 부어서 서 있었다. 노련한 상인 아저씨는 심술이 난 남자 손님에게도 상냥하게 말을 붙여 본다.


그런데 아저씨야 상냥하게 붙인 첫마디이지만 그 내용은 이 남자가 살면서 자주도 듣고 정말 싫어하는 ‘마누라가 훨씬 어려 보인다’는 바로 그것이다. 가뜩이나 네 발 짐승을 못 먹어 부아가 난 남자가 퉁명해진다.


“아뇨! 저 저 여자보다 딱 9개월 나이 많아요. 뭘 차이가 많이 나요 많이 나긴. 같은 배에서 나왔음 연년생이라고요!”


“오잉? 그래요? 흠.. 그렇다면 20대는 아니네? 무슈가 20대인데 그 상태면 병원 가야 하니께? 흠... 그러면… 30대? 아.. 30대라기에도 무슈 상태가 아닌데... 아냐!! 설마 50대는 아닐 거야!! 그렇다면 당신은 정말 마녀랑 사는 거구랴!!”


“아니 숫자 못 셉니까? 30 다음에 40은 왜 뛰어 넘나요?”


까칠한 남편은 별 걸 다 트집 잡기 시작했다. 저울 위에 누워 있던 골뱅이들이 나 안 데려갈 거면 다시 퇴근한다며 튀어나올 판이다.


“오! 40대요? 당연히 후반? 그렇다 해도 마담은 진짜 마녀구랴. 대단하오.”


드디어 골이 잔뜩 난 남자가 안 해도 될 아무 말 대잔치를 혼자 벌이기 시작한다.


“흥! 이 여자가 뭐가 그리 젊어 보인다고... 나랑 비슷하구만. 나도 화장하면 이 정도 됨!”


“어쨌건 부인이 세련되고 예뻐서 참 좋겠어요.”


“흥! 오늘만 보아서 그렇죠. 보통 열흘에 하루 이래요. 다른 날은 장난도 아니에요.”


“아이고 화장을 잘 안 해서 이리 피부가 좋으시구랴. 어쨌건 댁은 좋겠수.”


“아니라니까요. 열흘에 하루 이렇다니까요. 거참... 나중에 보고 얼마나 놀랠라고...”


아저씨는 계속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부인 예쁜 건 복이라고 이유는 오로지 하나, 마누라가 네발짐승 못 먹게 해서 화가 난 남자를 달래 보았다.


솔직히 예쁘다는 말을 싫어하는 여자가 어딨겠나. 들어도 들어도 제일 기분 좋은 말이 예쁘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옆에 어떤 남자가 인상을 그리고 있거나 말거나 꽃노래를 부르며 쇼핑을 마쳤다.


언젠가는 보이게 될 나의 민낯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


그날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도래했다.


그래, 다음번 마트를 향하던 날 살짝 망설인 건 사실이다. 그렇게나 나를 예쁘게 보아주시는 생선가게 아저씨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풀 메이크업을 해야 하나 잠시 생각했지만 뭐 영원히 마트 갈 때마다 생선가게 아저씨 때문에 메이크업을 하는 것은 매우 성가시다는 결론이 금방도 도출되었다. 매도 빨리 맞는 것이 낫지. 아니 사실은 그저 귀찮아서 그냥 하던 대로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그야말로 내추럴한 민낯에 집에서 쓰는 희멀건한 분홍 안경을 쓰고 계절을 타지 않는 전천후 동네용 건강신발을 챙겨 신었다. 아, 물론 아직도 추우므로 야밤에 길거리에서 군밤을 팔아도 안 얼어 죽을 똥똥한 패딩도 착용.


그런데 내가 이리 당당함을 부린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오늘의 쇼핑리스트에 물고기는 없었으므로 생선 가게만 잘 피해 다니면 되겠다는 계산이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장보기 패션으로 따라나서는 마누라를 보며 남자가 알쏭달쏭한 미소를 지을 때 알아봤어야...


마트를 들어서자마자 남자는 급하게 생선 가게 쪽으로 손을 잡아끌었다.


“왜 이래? 나 오늘 물고기 안 살 건데?”


“아니 누구 맘대로? 네발짐승이 몸에 안 좋다며? 생선이 훨씬 고급 단백질에 비타민, 오메가 등등도 많다며? 그러니까 오늘도 그 고급 단백질들 사러 가자.”


“아냐, 오늘은 육지 고기를 먹겠어.”


“안돼. 오늘은 내가 물고기 땡김.”


“아, 됐어! 지금 생선 가게 아저씨한테 내 실체를 까발리겠다. 이거잖아 지금!! 내가 바보냐?”


“오 노노! 오해하지 마. 난 진짜 진짜 오늘 물고기 꼭 먹어야 해. 안 먹으면 물고기 결핍으로 죽을지도 몰라.”


“사람이 그리 쉽게 안 죽는다고 몇 번을 말해!!”


진짜 유치하기 짝이 없는 걸로 싸우는 와중에 이미 생선 가게 앞에 도착.


떠밀리다시피 생선 가게 가판대 앞에 섰는데 정작 나를 데려다 놓은 남자는 저쪽 편 선반에서 소스류를 먼저 가져오겠다며 사라졌다.


“그래서 무슨 물고기를 사란 거야!!”


“잠깐 거기 기다리고 있어!”


나름 치밀하게 덫을 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남자가 왜 이랬는지를 알게 된다...


“봉주르!! 무엇으로 드릴깝쇼!”


아저씨는 여전히 유쾌하고 친절했다.


“잠시만요, 남편이 와서 고를 거예요.”


“아! 관광객이 아니군요? 이 근처에 사나요?”


아뿔싸...

이 아저씨가....

절대 치매나 메멘토 아니고 암산도 엄청 잘하는 이 아저씨가... 불과 며칠 전에 똑같은 자리에서 만났던 나를 기억 못 하고 있다… 이것이구나... 저 인간이 노린 것...


당황스럽지만 또 딱히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먼저 ‘이 보세요, 아저씨? 저예요, 저! 며칠 전에 그토록 제일 예쁜 아시아 여자라고 칭찬하셨던 저 말이에요!’라고 말할 순 없지 않은가...


남편이 아직 안 왔지만 둘러보니 새우가 괜찮아 보여 먼저 요청드린다. 새우를 한 움큼 집으면서 사람 좋은 아저씨가 역시나 싹싹하게 말을 걸어왔다.


“이 근처로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었죠? 나도 이 마트는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지만 난 이 동네에서 꽤 오래 장사를 했었답니다. 마담은 본 적이 없으니 아마도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었나 봅니다.”


“음.. 2년 정도 되었어요.”


“오! 그럼 그리 얼마 안 된 것도 아니구랴. 어때요. 파리가 아니라 불편하지 않소? 아시아 사람들도 없고... 아 맞다!! 같은 국적은 아닌 거 같은데(여기서부터...) 이 동네에 아주 아주 예쁘고 세련된 아시아 마담이 한 분 산다오. 좀 많이 늙어 보이는 한 살 많은 남편이랑 사는데 아주 사람이 좋아요. 그 무슈 말고 마담이... 남편이 꽤나 까칠한데도 어찌나 마음이 좋은지. 그저 상냥하게 웃는다니까.”


나는...

그날... 내가 유독 상냥하게 웃었던 이유가 사람 좋아서 까찔한 남편과 살아도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 아저씨의 칭찬 때문에 고래 춤을 추던 중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아니, 무엇보다 그 예쁘고 나랑은 국적이 다른 그 마담이 나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부부 좋다는 게 뭐겠는가.

내가 하기 힘든 것을 해주기도 한다는 거 아니겠나.

그새 남편이 소스는 핑계였던 모양 빈손으로 잔뜩 심술이 올라 옆에 붙어 섰다. 행운아답게 딱 맞추어 아저씨가 ‘유독 늙어 보이는 무슈’ 이야기를 할 때...


“내가 말했죠? 예쁜 날은 열흘에 하루라고? 그 마담이 이 마담이오. 놀랍지 않습니까?”


“헉!!! 헉!!!!”


그럴 필요까진 없지 않나... 리액션이 크다고 무조건 좋은 건 방청객에 한정되어 있는 거 아닌가... 왜 저렇게 턱 빠지게 놀라나... 그리고 누군가가 나를 두고 이리도 경이로워하는데 나는 왜 기분이 나쁘고 난리지?


“아... 아... 그러고 보니... 목소리가... 나는 진짜 아시안은 목소리가 다 비슷한 줄... 아... 아니 그래도 정말 정말 어려 보이십니다.”


더 이상 그의 입에서 ‘예쁘다’는 말은 절대 나오지 않는다. 그는 어떻게든 친절하려고 무조건 어리다고 계속 칭찬했다.


“진짜 틴에이저 같은데요?”


아저씨가 조금 심하게 오버하자 유독 마누라 외모에만 객관적이고 냉철한 한 남자가 또 찬물을 시원하게 한 바가지...


“저 안경이 진짜 돌돌이라 그래요. 안에 숨어 있는 주름이 다 펴져 보이거든요. 저것도 벗기고 봐야 돼요. 진짜 안 늙는 사람이 어딨어요. 다 살펴보면 제 나이는 숨어 있어요!! 뭘 자꾸 어려 보인대.”


“아... 마담이 눈이 나쁘시구나...”


그런 거 아는지? 뭔가 대화를 해야는겠는데 할 말은 딱히 없을 때면 사람들이 가장 쉽게 쓰는 기술이 바로 상대방이 했던 말 따라 하면서 동의하기이다.


“그렇소. 눈이 진짜 나빠요. 저 안경 한 번 써보잖아요? 바로 무중력 상태 체험 가능해요. 마구 땅이 올라온다니까?”


그런데... 이렇게 까지.... 누군가에게 마누라 눈 자랑을 해야 하나?


“오!! 나 한 번만 써보면 안 돼요?”


이 아저씨도..

절대...

정상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며칠 전 상냥하고 우아한 마담 역시 허깨비였음을 스스로 커밍아웃하기로...

한 톤 내려간 저음에 약간 쌀쌀한 눈빛을 장착하고...


“아뇨. 안경 늘어나요...”


쇼핑을 마치고 우리는 또 한 번 일상 속의 아인슈타인 상대성 원리를 깨우치는 시간을 갖는다.


아주 시원하게 싸우면 시간이 쏜살 같이 흐른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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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comentários


angel416bm
29 de nov. de 2023

고서방님도 참.. 그쵸 내 아내 참 아름답죠 한마디면 저 모든 상황에서 승자가 되는건 물론이요, 그 아름다운 아내에게 콩고물도 얻을터인데.. 여전하시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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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zelle Di Crollalanza
Hazelle Di Crollalanza
29 de nov. de 2023
Respondendo a

그런 심성이면 고서방 스토리가 존재하지 않을듯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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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랑s
29 de nov. de 2023

아주 시원하게 싸우면 ㅎㅎㅎㅎ 아우 고서방님 얄밉게 ㅋㅋ 매를 많이 버셨겠어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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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zelle Di Crollalanza
Hazelle Di Crollalanza
29 de nov. de 2023
Respondendo a

아주 등에서 묵직하게 울리는 소리 나더라고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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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cari1979
28 de nov. de 2023

매를 버는 스타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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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zelle Di Crollalanza
Hazelle Di Crollalanza
29 de nov. de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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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보면 매를 벌고 싶어하는지도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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